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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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 딸 유관순
이화학당
유관순은 1915년 봄 기독교 감리교 충청도 교구 본부의 미국인 여자 선교사인 샤프여사(s. Alise H. Sharp)의 주선으로 교비장학생으로 이화학당에 수학하게 되었다. 이화학당에는 관순의 사촌언니 유예도가 먼저 다니고 있었고, 이화학당에 들어온 관순은 말로만 듣던 신학문을 배우는 것은 물론 종교적 배움을 통해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학교근처에 있는 정동교회에 다니며 신앙심을 키우고 틈나는 대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기도했다. 이처럼 깊은 유관순의 신앙심은 훗날 일제의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순국할 수 있었던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
유관순열사가 다녔던 정동교회
1919년 1월 22일 광무황제(1852-1919)서거는 온 국민을 나라 잃은 슬픔에 젖게 했으며, 민족대표는 이 사건을 독립운동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은 전국에서 몰려온 애족행렬들로 넘쳐났다.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문의 발표로 시작된 삼일 운동은 2000만 민중의 하나된 외침이었으며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우리 동포가 있는 곳 어디서든 힘차게 울려퍼졌다.
민족대표 33인

3.1 독립운동 봉기 현황

3.1 독립운동 봉기 현황
시위횟수 1,542회
참가인원 약 200만명 (당시 인구 약 2,000만명)
독립운동화
유관순은 김복순, 국현숙, 서명학, 김희자 등과 함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에도 참여했다. 만류하는 프라이 교장선생님 등을 뿌리치고 학교담을 넘어 탑골공원까지 나가 만세를 부르고 돌아왔다.

3월 2일 학생대표들이 이화학당에 와서 3월 5일 학생단 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고했다. 유관순과 5인 결사대는 3월 5일 남대문 앞에서 벌어진 학생단 시위도 참여했다. 이날 유관순을 비롯한 학생들은 지금의 남산에 있었던 경무총감부로 붙잡혀 갔다. 외국선교사들이 아이들을 내 놓으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자 국제여론을 일으킬 수 있는 외국인들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학생들을 풀어주었다. 이렇게 유관순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3월 10일을 기해 모든 학교에 임시휴교령이 내려지자, 유관순은 같은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 병천으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