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의 오빠 유우석은 유관순을 이렇게 기억한다.
“그 시절엔 한글을 반절이라고 했지요. 아무도 관순이에게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그 반절을 혼자 익혀서 성서를 읽더니 외워대지 않겠어요. 재주는 꽤 있었던 것 같애.”
“내가 17살에 5~6가구밖에 살지 않는 이 마을에 시집을 왔을 때 소녀 관순은 귀밑머리, 황새머리, 조랑머리로 머리를 세 갈래로 땋고 사내처럼 동네를 휘젓고 다녔으니까 5살 되었을 거야.”
김원숙 할머니와 같은 부락에 살며 조부인 최준근으로부터 유관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왔던 최선재씨에 의하면 유관순은 용두리와 탑원리를 전전하며 여러 차례 이사를 했고, 작은 집에서 어렵게 기거했다고 한다.
“유관순은 이마가 넓고, 미간이 윤택하며, 눈이 약간 큰 듯하나 흑백이 분명하고 광채가 유난히 빛나며, 코가 뚜렷하고, 아래 위가 고르고 튼튼한 체격을 가졌다.”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의 며느리인 김정애씨는 유관순의 이화학당 재학시절 찍은 사진을 보며 유관순의 생김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실제로 유관순열사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때 기록했던 수형자 기록표를 보면 유관순열사의 신장은 5자 6치, 즉 11자를 30.3cm로 환산하면 169.7cm이다. 조선총독부 관보 제 3226호(1923년 5월 15일)에 따르면 당시 여학생의 평균키는 4자 98치, 즉 150cm 였다. 유관순열사는 키가 크고 활달하며 남자 못지않은 배포가 있는 소녀였던 것이다.
이화학당 기숙사는 공부 종을 친다음 자기 전에 기도종을 치면 방에 있는 사람들이 돌아가며 기도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 날은 유관순이 기도하는 날이었는데 유관순은 기도를 끝낼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하는 것을 “명태 이름으로 빕니다.”라고 하였다. 친구들은 모두 배를 잡고 웃었고 이 소리를 듣고 사감선생이 달려와 이 방 학생들에게 품행점수를 낙제점을 주었다고 한다.
유관순은 보각스님 집에서 보내온 명태반찬이 하도 맛있어서 명태생각에 그렇게 기도했다고 하여 친구들이 다시 한번 웃게 만들었다.
사촌인 유경석과 노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당질인 유제경에게는 손수 뜨개질을 하여 모자를 선물하기도 했으며, 학교에서는 어려운 청소를 도맡아 했었다고 한다.
이같이 유관순은 또래 소녀들처럼 장난 잘치고 웃음 많고 뜨개질을 좋아하는 18세 소녀였던 것이다.
이는 유관순의 나이 8살 때의 일이다.
꿈 많고 총명하며 장난잘치고 웃음 많던 소녀 유관순은 나라를 빼앗긴 서글픈 시대적 현실속에서 배일의 사상이 싹텄고 부친에게 기울어진 민족의 국권 회복을 위하여 혼과 마음을 불태울 이념과 정신도 공급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