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연보
유관순열사 <
연보
- 12월 16일(음력 11월 17일)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옛
지명은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아버지 유중권의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이소제 여사이다.
- 이 해 12월 2일부터 10일간 광무황제 재위 40년 기념행사와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기념비전이 건립되고, 스웨어러 선교사는 목천지역에서
교회 사업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고했다.
- 12월 7일 유관순의 바로 아래 남동생인 둘째 아들 유인석(柳仁錫)이
태어났다.
- 2월 9일 러시아와 일본사이의 전쟁이 발발했다. 불안한 사람들이 안전을 구하기 위해 기독교로 많이 개종하는 계기가 되었다.
- 유관순은 이 전후 시기부터 약 5~6세까지 탑원리에서 살았다는 증언이
있다.
- 11월 17일 소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해 감리교 지령리교회가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 같은 용두리의 조병옥이 영명소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다.
- 2월 목천군 청년회에서는 민영환과 조병세 두 충정공에 대한 분향소를 설치하고, 이분들과 같이 순국한 분들을 위하여 군내 복귀정에 사당을
만들었다.
- 7월 19일 광무황제는 일본의 압력에 의해 칙령을 발표하고 퇴위하였다.
- 4월부터 12월까지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 8월 '충남 목천 이동면 대지령 야소교당'의 이름으로 82명의 교인과 동리사람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중에 조인원,
유중무(아들 유우석의 이름으로 참여한 것으로 보임), 유중권 등 3.1운동의 주역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 9월 3일 아침 조치원 북쪽의 소정리 정거장이 의병부대의 공격을 받아 불탔다. 하반기부터 의병운동이 병천 주변에서 격화되었다.
- 가을(10월 말경) 목천 교회가 일본군의 방화로 불타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군의 총살형을 받고도 구사일생으로 한 사람이
살아나왔다.
- 9월 27일 목천군 기호흥학회가 출발했다.
- 목천군에서는 이 시기에 보명학교, 수신학교, 녹동학교, 진명학교, 장명학교, 명진학교, 병진학교와 그 후신 홍호학교 등 여러 학교가
설립되고 매우 활발하게 교육운동이 진행되었다.
- 지령리 유관순의 동리에서는 지령리예수교회에서 '진명(명진)학교'를 설립하였다.
- 6월 12일 충북 진천의 다섯 개 학교와 병천학교가 연합운동회를 열었다.
- 이복언니 이계출이 시집가다.
- 사촌 유경석이 공주 영명학교 보통과에 입학하고, 조병옥이 평양 숭실학교 입학했다.
- 8월 29일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다.
- 막내 남동생 유관석(柳冠錫)이 1911년 1월 10일 태어났다.
- 오빠 유우석이 진주 유(柳)씨와 결혼했다.
- 사촌 유경석이 공주 영명학교 고등과에 입학하였다.
- 조병옥은 배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 5월 27일 유우석의 어린 신부 유씨가 전염병에 걸린 친정부모를 간호하다
전염되어 사망하였다.
- 사애리시(Alice Hammond Sharp, 史愛理施) 선교사 주선으로 공주영명여학교 보통과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 6월 6일 지방행정구역이 개편되어 목천군, 직산군이 천안군에 통합되고, 면리에 큰 변화가
있었다.
- 조병옥이 미국 유학을 떠나다. 그는 『신한민보』3.14일자에 「독립의 희망봉」이란 글을 기고했다.
-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 서울 정동교회에 손정도 목사가 부임하면서 교인들에게 민족혼을 불어넣기 시작하였다.
- 이화학당 보통과 1학년 편입
- 오빠 유우석이 공주 영명학교에 입학하였다.
- 4월 3일 사촌 유경석(유중무의 장남)이 영명학교 출신의 노마리아와 결혼하였다.
- 유경석과 노마리아 사이에 조카 유제경이 출생하다.
- 유관순은 조카를 위해 뜨개질로 모자를 만들어 선물했다.
- 유관순이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였다.
- 4월 1일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1학년에 진학하였다.
- 6월 감리교 연회에서 정동교회에 이필주 목사를 파송하였다.
- 8월에 미가 폭등으로 8월 28일 종로소학교 운동장에 설치된 경성구제회미염매소의 판매소에서 민중소요가 일어났다.
- 10월부터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인은 전체인구의 3명 중 한명꼴인 742만 2,113명의 환자가 발생해 그 중 13만
9,128명이 사망했다.
- 11월 11일 4년간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 3월 1일 3.1운동이 발발하였다. 유관순은 학교 담을 넘어 서울 시위운동에
참여하고 학교로 돌아왔다.
- 3월 3일 광무황제 국장례가 거행되었다. 이날은 시위가 자제되었다.
- 3월 5일 서울에서 학생단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유관순은 이화학당 친구들과 함께 이 시위운동에 참여했다가
경무총감부에 붙잡혔다 풀려났다.
- 3월 10일 각급 학교에 휴교령이 내렸다.
- 3월 13일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고향 천안으로 왔다. 유예도는 이 때 학교 선배그룹으로부터 독립운동 자금모금의
사명을 받았다고 하였다.
- 3월 14~31일 유관순은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하였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각 마을을 다니면서
시위운동 참여를 권유하였다.
- 3월 31일 유관순, 매봉산에 봉화를 올렸다.
- 4월 1일 아우내 만세시위 발발하다.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숙부 유중무, 속장 조인원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였다. 오빠 유우석은 공주에서 시위운동에 참여하다 부상당해 붙잡혔다.
-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법원에서 5년형을 받았다.
- 6월 유관순과 아우내 만세 주역들이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다. 이에 따라 유관순과 이들은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 6월 30일 유관순은 경성 복심법원 재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유관순은 상고를 포기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 8월 29일 유우석은 공주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 9월 11일 유관순을 제외한 병천과 수신.성남지역 시위 주도자들의 상고가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었다.
- 1월 22일 광무황제가 갑자기 서거하였다.
- 2월 8일 일본 동경 유학생 400여명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하였다. (2.8 독립선언)
- 3월 14일 오후 4시 목천보통학교 학생 120명(목천 기미독립운동기념 사업회에서는 171명이라 함)이 교정에서 시위운동을
하였다.
- 11월 6~11일 정동 제일교회에서 열린 기독교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천안지역 3.1운동 피해보고와 함께 수감 교역자에게는 20원, 기타
수감자에게는 5원의 구제금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 3월 1일 오후 2시, 유관순이 서대문 감옥에서 옥중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모진 고문에 의한 방광 파열로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했다.
- 10월 12일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의 시신을 인수하여 수의를 해 입혔다.
-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 주례로 유관순의 장례식이 거행되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