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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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 딸 유관순

서대문 독립공원 유관순열사 동상건립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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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유관순열사 연보
이름 최고관리자 작성일 20-05-11 10:57 조회 38
파일
 홈페이지_유관순열사_연보.hwp (2.5M) [2] DATE : 2020-05-11 10:58:06
유관순열사 연보

1. 유관순열사의 조상

1902년12월16일 (음력 11월17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현주소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 생가길 18-2)에서
아버지 유 중권(1863년생), 어머니 이 소제(1895년생)의 3남 2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1886년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으로 이화학당 창설.
                      (미국선교사의 요청으로 고종황제가 허가함.)

1905년 을사보호조약
1909년 양력 및 호적(현: 가족관계증명서)시행
        안중근 의사 하얼빈에서 이등박문 사살
1910년 한일합병(경술국치)
1910년 ~1919년 토지조사 사업시행  (토지의 지목, 지번, 지적, 부여함)
1915년 이화학당 보통과 편입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 졸업
      4월 1일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1학년 입학

1919년 1월 22일 광무(고종)황제 서거
      3월  1일 3.1 독립운동 일어나다.
      3월  5일 남대문 역 (현:서울 역) 시위참가
      3월 13일 휴교령에 따라 고향 천안으로 내려감.
      3월 31일 매봉산에서 내일 만세운동을 확인하는 봉화 올리다.
      4월  1일 아우네 장터 독립만세운동 주도하다.
            (유열사의 부모를 포함 19명이 사살되고 30명이
            부상당하다. 천안 헌병대에서 주모자 색출을 위한
            모진고문을 받다.)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7년)형 선고 받음.
      5월 20일 서울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 선고받음.
            (3.1독립운동 관련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학생
            71명중 여학생으로 형량이 가장 많은 징역3년형이다.
            유관순열사는 보안법 위반에 형법 상 소요죄가 추가
            적용되어 형량이 가장 많았으며 71명 학생 중 서대문                감옥에서 유일하게 순국한 학생도 유관순열사 뿐이다. )

1920년 3월 1일 서대문 형무소 내 옥중만세 운동 주도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독하기로 소문난 야마사끼
                간수 부장의 갖은 고문으로 방광이 터져 치료하지                  못하고 마침내 순국하셨다. )
        9월 28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셨다.
      10월 12일 이화학당에서 열사의 시신을 인수
      10월 14일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 주례로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

1936년 12월 29일 이태원 공동묘지가 군사시설 및 주택지 조성으로 1935년~1936년간에 철거함에 따라 유열사의 묘를 포함한 무연고자 분묘 28,000여기를 유골을 화장하여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 공동묘지에 합장하고 위령비를 세웠다.

1962년  3월  1일 정부에서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하다.

1989년 10월 12일 충남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매봉산 중턱에
유열사의 원한을 풀어드리고 영혼을 위로하여 편히 잠드실 초혼묘을 봉안하다.  (표1 참조)


1996년 5월 30일 이화여고 창립 110주년 기념식에서 유관순열사의 명예졸업장 수여.

2015년 9월 23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부군당에 1936년(소화11년) 이태원 공동묘지 이장과정에서 무연고묘로 실전 되어버린 유열사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자 공동묘지가 바라보이는 이곳에 30만 용산구민의 뜻을 모아 추모비를 세웠다. (표2 참조)

2018년 9월 7일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관순열사
분묘 합장 표지비를 세웠다. (표3 참조)

2019년 3월 1일 정부에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으로
                승격 추서하다.


(표1) 유관순열사 초혼묘-충남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매봉산 중턱




(표2) 유관순열사 추모비-서울 용산구 이태원 부군당



(표3) 유관순열사 분묘 합장표지비-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동묘지

유관순열사의 조상

  유관순열사의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득관조이신 영밀공 유 청신은 고려 고종 44년 (1257년)에 전남 고흥에서 출생하셨다.

  원나라의 간섭기인 고려 충열왕, 충선왕, 충숙왕 3대를 섬기는 도첨의 정승으로 고려 왕실은 원나라 부마(사위)로써 원 왕실의 뜻에 따라 부자간에도 수차례 왕위가 바뀌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29차나 원나라를 왕복하면서 뛰어난 외교력으로 고려 왕실과 국권을 수호하는데 충신중의 충신이었다.

  충열왕 16년(1290년)에 원나라에서 왕가를 모시고 돌아올 때 호두의 묘목과 씨앗을 가져와 천안지역에 시배시켰다.

  그의 손자인 충정공탁은 공민왕 때 도첨의 정승으로 왕이
노국공주의 제당을 건립토록 하였으나 흉년으로 국민 생활이 어려운데 큰 공사를 할 수 없음을 간하여 결국은 공민왕의 노여움을 받아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 후 조선태조 이 성계는 공의 충정을 기리어 신원하고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광해군 때에 어우 유몽인은 설화문학의 대가이며, 선비의 도리와 불사이군의 신념으로 인조반정 때 절의를 지켰다.

근세 유학자 문정공 성제 유 중교는 위정척사(주자학을 지키고 천주교를 물리치던 주장)를 주장하였고 의암공 유 인석은 13도 의병도총재로 항일투쟁을 하시다가 이역에서 순절하시었다.

  고흥유씨가 충효가문으로 유명한 것은 애친, 애국, 애민사상이 자손에게 계승되어온 증거라 할 것이다.

유관순열사 집안을 전통적인 유교집안이었다.

  그러나 합일합병과 개화기에 지역적으로 충남 목천군 아우네 장터는 충남의 대표적 문물교류의 중심지였으며, 서양문명이 전래되는 전초기지로 기독교의 많은 외국선교사들이 왕래하고 있었다.

  유열사의 가족도 기독교가 현실적으로 부합된 교리와 당시 사정을 이해하고 쉽게 기독교로 전향하는 신도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와중에 유열사는 유교와 기독교의 차이점과 구시대와 신시대의 세대차이, 구시대와 신시대의 물물교류, 세계적인 인간들의 사상과 습관 등 변화하는 시대적 환경속에서 자유와 독립. 그리고 애국의 중요함을 깨달음이 담대하고 남달랐다는 점을 찾을 수 있다.


2.유관순열사를 한없이 우러러본다.
유관순열사를 한없이 우러러본다
  유관순열사는 비록 17세에 3.1독립운동에 참여하여, 18세에 갖은 고문으로 옥중에서 순국한 짧은 생애를 살았으나 한 인간으로서 또 여성으로서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귀감이 되어 주셨다.

우리들은 잊지 않고 기억하여 조국의 무궁한 발전에 영원히 기여하고자 한다.
첫째 유관순열사는 일본의 재판권을 부정하고, 재판을 거부하는 논리적인 판단력을 가졌다.
  ◎ 공주법정에서 나는 조선사람이다. 조선사람인 내가 침략자인 일본놈들에게 재판을 받을 까닭이 없다. 

따라서 너희들은 나에게 죄 줄 권리도 없다고 항거하여 불복했었다. (공주에서 징역5년(7년) 선고됨)

  ◎ 경성법정에서도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한 독립만세를 부른 것이 무슨 죄가 되는냐
그리고 내가 침략자인 왜놈의 재판을 받을 이유가 무엇이냐』 하여
끝까지 재판을 거부했다. (서울복심원에서 징역 3년 선고 됨)

  ◎ 삼천리 강산이 어딘들 감옥이 아니겠는가? (상고를 하지 않으며)
이로써 유열사는 일본의 재판권을 부정하고 재판을 거부하므로써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우리민족의 자존심을 지켜 주셨음으로 우리들은 유관순열사를 3.1독립운동의 꽃이요 민족에 누나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근대 역사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둘째 유관순열사는 자유정신의 실천가였다.
비록 나이어린 소녀였으나 인간사회에서 자유는 생명과 같으며 나라의 독립은 자유를 보장하는 관건임을 확신하고

서울과 고향 병천에서 심지어 옥중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켜 자유와 나라의 독립을 외쳤다

자유는 하늘이 내려준 것이며 누구도 이것을 빼앗을 수는 없다.

신은 인간을 창조하였지만 미완성품으로 만들어 졌으므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인간 존재로 완성시켜야 한다. 

인간은 이성을 통하여 인간성을 획득할 자유를 누리고 이러한 자유를 표출함으로써 자신을 인간적 존재로 만든다.

이 자유는 인간의 기본적 인권이며 인간의 존엄성은 이러한 인간의 기본적 인권 없이는 생각 할 수 없다.

셋째 유관순열사는 굴복하지 않은 정신력을 가졌다.
유열사는 결코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고문과 투옥에도 굴복하지 않은 애국 애족의 강인한 정신력과 모든 고통을 소리 없이 참아내는 인내력은 인류의 자유와 양심의 역사에 고귀한 발자취를 선명하게 남겼다.

일경은 17세의 소녀가 3,000여명의 아우네 장터 만세운동의 주모자라고 믿을 수 없었다.  반드시 배후의 선동자를 잡아야한다.

 이렇게 작심한 천안 헌병대에서 참아 말로 옮길 수 없는 잔인한
형벌을 가하면서 추궁하였다.

  그러나 유열사는 이러한 위세에 조금도 기운이 꺾이지 아니하고
입술을 깨물어 피를 흘리면서 끝끝내 주모자는 자기라고 주장하였다.

너희가 어떠한 협박을 할지라도 주모자가 아닌 남을 주모자라고
거짓대답은 할 수 없다 하였다.

1920. 3. 1. 서대문 형무소의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로 독하기로
소문난 야마사끼 간수부장의 잔인한 고문으로 방광이 터져 쓰러졌다.

넷째 유관순열사는 인간적으로 신실(信實 믿음직하고 착실함)한 사람이었다.
유열사는 자신보다 어려운 남을 우선적으로 도와주었다. 
옥중에서 함께 생활한 어윤희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유열사와
함께 8호 감방에 수감되었던 구세군 사령부인 임영애는 임신 중
체포되었다. 

임명애는 출산이 임박하여 1919년 10월 보석으로 풀려났다가
출산 후 11월에 신생아와 함께 다시 들어와 수감생활을 하였다.

엄동설한에 감옥 안에서 그녀 자신의 추위와 외로움 배고픔에
고통 받는 중에서도 산모죄수를 위해 자기 밥을 덜어주고 젖은
기저귀를 손으로 짜서 몸에 감아 녹여주는 등 친절한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믿는 바와 행하는 바가 일치하는 정금미옥(精金美玉:정교하게 다듬은 금과 아름다운 옥이라든 뜻으로 인품이나 시문 따위가 맑고 아름다음을 일컫는 말이다)의 삶을 살았다.

다섯째 유관순열사는 가족을 애틋하게 사랑하였다.
유열사의 부모는 총살되었고 그의 집은 포악한 왜병들의 손에 방화되었다.  어린 두 동생이 부모와 집을 잃고 거지가 되어 방황 할 것을 생각하며  내 동생 내 동생들하고 몹시 울었다.


혹독한 고문 앞에서는 입술을 깨물어 피를 터져가며 참고 그리고 눈물을 보이지 않던 그도 길거리에서 방황할 자기 육친을 생각 할 때는 눈물이 아니 흘릴 수 없었던 것이다.

여섯째 유관순열사는 최후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비폭력이라는 민족대표의 독립선언 원칙을 충실이 따랐다.

일곱째 유관순열사는 일제 식민지 교육아래서 자라난 첫세대로 식민지 노예교육에 얽매이지 않고 민족적 의식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신세대를 대표하고 있다.


3. 유관순열사가 순국하신 이후에도

유관순열사가 순국하신 이후에도

첫째 각종 매체를 통하여 일제의 민족정신 말살의 식민지
교육으로부터 부단히 민족정신 회복을 통한 민족정기회복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참고로 일본이 조선의 3대 교육강령
      첫째 황국신민화를 철저히 하기위한 국체명징(명백한 증거)
      둘째 민족성 말살을 위한 내선일체
      셋째 침략전쟁아래서 인내를 강요한 인고단련

둘째 열사의 애국, 애족, 박애, 희생, 봉사, 평화의 정신을 실천한  21세기에 가장 요구되는 한국적 인물상이다.

셋째 일제에 저항한 세계가 공인하는 한국 독립운동가로서
근세 민주화 과정에서 어린 청소년들의 불의에 대한 저항정신은
4.19의거와 그리고 군사독재에서 민주화를 이룩한 주체성과 우수성을
구현하는 인물이다.

넷째 3.1독립운동이 일어난지 100주년이 되었으나
유열사의 비폭력 저항운동은 오늘날의 세계 모든 젊은이들이
배워야하고 실천하여야 할 화두이며 이를 기리고자하는 세계적인
운동은 우리나라 국위를 높이 선양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