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12월16일 (음력 11월17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현주소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 생가길 18-2)에서
아버지 유 중권(1863년생), 어머니 이 소제(1895년생)의 3남 2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1886년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으로 이화학당 창설.
(미국선교사의 요청으로 고종황제가 허가함.)
1905년 을사보호조약
1909년 양력 및 호적(현: 가족관계증명서)시행
안중근 의사 하얼빈에서 이등박문 사살
1910년 한일합병(경술국치)
1910년 ~1919년 토지조사 사업시행 (토지의 지목, 지번, 지적, 부여함)
1915년 이화학당 보통과 편입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 졸업
4월 1일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1학년 입학
1919년 1월 22일 광무(고종)황제 서거
3월 1일 3.1 독립운동 일어나다.
3월 5일 남대문 역 (현:서울 역) 시위참가
3월 13일 휴교령에 따라 고향 천안으로 내려감.
3월 31일 매봉산에서 내일 만세운동을 확인하는 봉화 올리다.
4월 1일 아우네 장터 독립만세운동 주도하다.
(유열사의 부모를 포함 19명이 사살되고 30명이
부상당하다. 천안 헌병대에서 주모자 색출을 위한
모진고문을 받다.)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7년)형 선고 받음.
5월 20일 서울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 선고받음.
(3.1독립운동 관련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학생
71명중 여학생으로 형량이 가장 많은 징역3년형이다.
유관순열사는 보안법 위반에 형법 상 소요죄가 추가
적용되어 형량이 가장 많았으며 71명 학생 중 서대문 감옥에서 유일하게 순국한 학생도 유관순열사 뿐이다. )
1920년 3월 1일 서대문 형무소 내 옥중만세 운동 주도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독하기로 소문난 야마사끼
간수 부장의 갖은 고문으로 방광이 터져 치료하지 못하고 마침내 순국하셨다. )
9월 28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셨다.
10월 12일 이화학당에서 열사의 시신을 인수
10월 14일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 주례로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
1936년 12월 29일 이태원 공동묘지가 군사시설 및 주택지 조성으로 1935년~1936년간에 철거함에 따라 유열사의 묘를 포함한 무연고자 분묘 28,000여기를 유골을 화장하여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 공동묘지에 합장하고 위령비를 세웠다.
1962년 3월 1일 정부에서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하다.
1989년 10월 12일 충남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매봉산 중턱에
유열사의 원한을 풀어드리고 영혼을 위로하여 편히 잠드실 초혼묘을 봉안하다. (표1 참조)
1996년 5월 30일 이화여고 창립 110주년 기념식에서 유관순열사의 명예졸업장 수여.
2015년 9월 23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부군당에 1936년(소화11년) 이태원 공동묘지 이장과정에서 무연고묘로 실전 되어버린 유열사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자 공동묘지가 바라보이는 이곳에 30만 용산구민의 뜻을 모아 추모비를 세웠다. (표2 참조)
2018년 9월 7일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관순열사
분묘 합장 표지비를 세웠다. (표3 참조)
2019년 3월 1일 정부에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으로
승격 추서하다.
(표1) 유관순열사 초혼묘-충남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 매봉산 중턱
(표2) 유관순열사 추모비-서울 용산구 이태원 부군당
(표3) 유관순열사 분묘 합장표지비-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동묘지
유관순열사의 조상
유관순열사의 본관은 고흥(高興)이며 득관조이신 영밀공 유 청신은 고려 고종 44년 (1257년)에 전남 고흥에서 출생하셨다.
원나라의 간섭기인 고려 충열왕, 충선왕, 충숙왕 3대를 섬기는 도첨의 정승으로 고려 왕실은 원나라 부마(사위)로써 원 왕실의 뜻에 따라 부자간에도 수차례 왕위가 바뀌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29차나 원나라를 왕복하면서 뛰어난 외교력으로 고려 왕실과 국권을 수호하는데 충신중의 충신이었다.
충열왕 16년(1290년)에 원나라에서 왕가를 모시고 돌아올 때 호두의 묘목과 씨앗을 가져와 천안지역에 시배시켰다.
그의 손자인 충정공탁은 공민왕 때 도첨의 정승으로 왕이
노국공주의 제당을 건립토록 하였으나 흉년으로 국민 생활이 어려운데 큰 공사를 할 수 없음을 간하여 결국은 공민왕의 노여움을 받아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 후 조선태조 이 성계는 공의 충정을 기리어 신원하고
영의정으로 추증하였다.
광해군 때에 어우 유몽인은 설화문학의 대가이며, 선비의 도리와 불사이군의 신념으로 인조반정 때 절의를 지켰다.